본문 바로가기

좋은글

성령의 운행하심과 기름부으심을 따라가는 삶 - 릭 조이너

사람들을 동원하는데 필요한 핵심 사항 중 하나는 바로 사람들이 모여야 할 합당한 이유와 목표가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 이유와 목표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모임을 이끄는 리더십입니다. 사람들은 목표와 이유가 의로운 것인지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동시에 그 모임을 이끌어갈 리더십 역시 믿고 따를만한 분인지 알기 원합니다.

 

 

복음전파보다 더 위대한 목표와 이유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 보다 더 신뢰할만한 리더도 없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오늘날 직접 복음을 전하고 계신다면, 주님을 따르며 그분께 쓰임받는 것이 우리 삶 가운데 최고의 목표가 될 것입니다. 주님은 여전히 여기 계시고, 지금도 계속해서 복음을 전파하고 계십니다. 다만 그분의 사람들을 통해서 그 일을 하고 계실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사명을 제자들의 손에 맡기셨기 때문에, 제자들을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잘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순절에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로 한 사람들의 결단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자기 언어로 메시지를 들을 수 있는 엄청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메시지는 듣는 이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이 베드로는 겨우 몇 주 전에 예수님을 부인했던 자가 아닙니까? 베드로와 함께 있던 사도들 모두가 주님을 두고 도망가버리고, 주님이 가장 필요로 하실 그 때 주님을 홀로 두었던 사람들 아닙니까? 만약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 계셨다면, 결정하기가 훨씬 쉬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리더들을 따를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이 주님을 믿기로 결정한 것은 사도들 때문이 아니라 성령님에 의한 것 입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의 리더십을 맡기신 것은 제자들이 아니라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우리는 그분께 우리의 믿음을 드리고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성령님이십니다. 오늘날까지도 주님을 따르는 자들은 눈에 보이는 사람을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기름부으심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생각해야 할 점은 바로 주님이 방문하신 때를 놓쳐 버린 사람들에 대한 심판이 엄하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아있지 않게 될 것을 보시고 슬퍼하셨습니다. 이는 예루살렘이 주님의 방문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섯명의 어리석은 처녀 역시 주님이 오실 때를 준비하지 못해 잔치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성령께서 운행하실 때 그에 반응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가 바로 우리의 마음과 헌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정확히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미국과 여러 곳에 주님께서 방문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축복을 주고 계십니다. 이 역시도 시험입니다. 먼저는 교회의 리더십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시험입니다. 수백만은 아닐지라도 최소한 수만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께서 찾아오시는 것을 인지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에 반응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많은 이들은 주님의 방문을 놓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님께서 오셨다는 사실을 알아채지도, 그 안에 거할 수도 없을 정도로 바쁜 상황이거나, 어떤 사람은 보고도 그 의미를 인식하지 못해서 일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주님의 방문을 놓치는 대부분의 이유는 바로 주님의 방문이 본인이 기대했거나 인정할 수 있는 형태 외에 다른 모습으로 오기 때문에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미지근한 사람들은 주님의 방문을 놓치게 될 것이고, 마음이 차가운 사람은 오히려 맞서 싸우려 일어설 것입니다. 다소 사람 사울이 주님의 빛을 보고 말에서 말에서 떨어지기 전까지의 태도가 그와 같았습니다. 사울은 육신의 시력을 잃었을 때, 영의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실제로 이 땅을 걸으실 때 일어나는 일의 특징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특별히 찾아오실 때마다 동일하게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이런 방문에 놀라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역사 속에서 주님께서 어떻게 일하셨는지 연구하는데 보냈습니다. 그리고 제가 할 수 있는 한 많은 모든 사람들을 방문하려고 하였습니다. 주님을 놓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제 안에 있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성경에서 그 결과를 경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일하시는 일들을 찾고 연구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주님께서 하시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주님께서 행하시는 어떤 일도 놓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분명한 임재 안에 있는 것보다 제 존재의 핵심에 가까이 갈 수 있는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이에 비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 계셨을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행하고 계십니다. 제가 경험한 최고의 사건은 바로 주님의 행하심 가운데 있고, 사람들을 만지시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는 이 일에 중독되었습니다. 아니면 주님께 중독되었다는 말이 맞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향한 갈급함을 채우고 싶습니다. 

 

이 시대 주님께서 운행하시는 곳에 있기 위해서는 주님이 사용하시는 사람들 안에서 주님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23:29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외모나 편견을 따르거나 주님이 우리와 똑같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교만한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을 통해 역사하시기 때문에, 주님께서 일하시는 사람을 분별하는 일은 어쩌면 시험과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어떻게 일하실 것인지, 어떤 사람을 통해 일하실 것인지, 그리고 어떤 모습일지 다 가르쳐 주셨습니다.

 

 

 

인간의 이상주의적인 생각은 휴머니즘의 한 형태이며, 하나님의 참된 역사 가운데 거하기 위해 싸워야 할 적은 바로 종교의 영입니다. 주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들은 우선 열린 마음으로 주님의 가르침을 받습니다. 주님에 가르침에 잘 따르는 것과 어리석은 가르침에 속아넘어가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지난 주에 살펴본 것처럼, 주님의 방문의 때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며, 그 때를 놓친다는 것은 심판을 의미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지 못한 사람들을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각 시대에 주님께서 어떤 일을 행하시는지 알고자 하는 관심이 없다는 것은 다시 말해 가장 중요한 문제에 관심이 없다는 뜻이고, 주님의 목적과 계획하심에 우리 마음을 헌신하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주님께서 방문하시는 때를 놓칠 경우 반드시 심판을 받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심판이 곧 비난과 저주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심판에는 파괴를 의미하는 것에서부터 훈련을 가리키는 것까지 몇가지 다른 유형이 있습니다. 가장 무서운 심판은 바로 주님의 관심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이는 곧 우리가 주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의미 혹은 주님께서 우리를 우리 멋대로 내버려두신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은 사랑하는 자들을 훈련시키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무섭고 끔찍한 일은 주님께서 우리를 더 이상 우리를 훈련시키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잠언서에서는 지혜로운 자는 훈계를 사랑하지만 어리석은 자는 싫어한다고 반복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심판의 종류와 그 수준은 아마도 주님께서 우리를 방문하셨음에도 사람들이 거절해버린 주님의 기름부으심, 권능, 임재함의 수준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과 역사를 살펴보면, 주님의 방문을 놓친 자들에게 임한 심판의 수준이 사람들이 거절한 주님의 방문의 수준에 달려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선지자나 사도를 맞이하러 나가는 것을 방해하는 일과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을 맞이하러 나가는 것을 방해하는 일은 결코 같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어떤 수준에서 무슨 일을 하시든지 그 어느 것도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주님의 역사를 놓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 시대 행하시는 일에 헌신함으로 그 역사의 일부가 될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우리 삶을 주님께 드리고 그분의 뜻을 행하는데 헌신하며, 주님의 사역에 참여하는 의무를 귀히 여긴다 할지라도, 그 일을 행하는 우리의 동기는 의무로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원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역사 가운데 일원이 되는 것보다 더 영광스러운 것도, 우리를 더 만족시키는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역사하심을 분별하려는 노력이 우리 삶에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

 

 

전사들은 전쟁의 소리가 날 때 피하지 않고 그리로 달려갑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이처럼 주님의 역사하심을 향해 달려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의무사항이 아니라 우리 본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 안에서 참된 성숙의 길을 걷고 있다면, 인간된 우리의 최우선순위는 주님의 뜻을 행하는 것에 있을 것이며, 따라서 주님의 행하시는 일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방법으로 찾아오십니까? 주님께서는 처음 오셨을 때와 같은 그 방법으로 오십니다. 2천년 전과 마찬가지로 병든 자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으시며, 악한 영에 눌린 자들을 자유케 하십니다. 지금은 과거 반세기 동안 목도된 바 없는 주님의 놀라운 능력이 풀어지는 시대의 초반부에 진입해 있습니다. 어쩌면 이 같은 능력은 주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계셨을 때 이후로 한번도 나타난 적이 없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4:1의 말씀처럼 하늘에는 열린 문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치유의 은사를 행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할 수 있도록 문 하나가 활짝 열려있습니다. 이미 이 같은 은사와 사역을 펼치고 계시는 분들을 위해서는 더 높은 권위를 가지고 일할 수 있는 문이 또한 열려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시대 이 같은 방법으로 성령님을 부어주시는 이유 한가지는 바로 예수님이 우리의 치료자 되심을 우리가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곧 이 땅에 벌어질 일 가운데서 우리가 주님의 능력을 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현대 의학의 놀라운 발전에도 불구하고, 불치병이 점점 증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주님께 온전히 반응하고 주님께서 부르신 그 길을 걸어간다면, 사단이 만들어낸 모든 죽음과 질병은 오히려 대추수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온 세상을 만지시는 주님의 놀라운 역사와 부흥이 일어나 오늘날과 같은 치유의 역사가 크게 일어나는 때를 깊이 연구해본다면, 여러분은 이 치유와 부흥의 기적이 전세계적인 전쟁과 전염병과 같은 최악의 사태가 발생하기 직전에 일어났었다는 점을 발견하시게 될 것입니다. 만약 주님의 역사하심과 부흥이 중단되어 버린다면, 이후의 엄청난 비극은 피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저는 몇 년 동안 부흥을 촉발시키는 것은 무엇이며 반대로 부흥의 역사를 중단시키는 것은 무엇인지 연구해왔습니다. 모든 부흥 사건의 시작이 갖는 한가지 공통점은 각각이 모두 고유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부흥은 각기 다른 상황에서 각기 다른 방법으로 시작됩니다. 하지만 그 부흥이 끝나게 되는 방법은 기본적으로 동일합니다. 주님의 부흥의 역사가 어떻게 시작되는지를 설명하는 단순한 공식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순전히 왕되신 주님만을 따라가야 합니다. 물론 주님의 역사는 주님께서 움직이시는 것이어야 하며, 우리의 근본 목표도 주님께 더 가까이 가고 주님 곁에 머무르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창조주이시며, 창조적인 것을 좋아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주님은 독특한 사람들과 함께 새롭고 독특한 방법으로 행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와 달리 사단은 늘 사용하던 전략을 되풀이 합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이 구식 전략이 아직도 효력을 발휘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음 주에는 사단의 궤계가 어떻게 주님의 부흥의 역사를 가로막는지, 우리는 어떻게 이를 방지할 수 있을지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가 현재 일어나고 있는 부흥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를 통해 오늘날 계속되고 있는 주님의 역사를 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