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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려를극복하는지혜는무엇인가?

염려를 극복하는 지혜는 무엇인가?


우리 대부분은 두 가지 종류의 염려에 사로잡히기 쉽다.
하나는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의심이고, 또 하나는 우리의 부주의 또는 
‘사려 깊지 못함’에 대한 염려
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만일 첫 번째 종류의 염려에 시달린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전능하시며 우리를 돌보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사실 이런 염려는 신자에게 적당하지 못하다. 
오히려 신자로서 우리가 올바르게 행동하는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이로라”(고전 9:27)
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연약한 인간성과 죄악된 성향을 적절히 억제하지 못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지도 
모른다고 염려했다. 이것은 신자로서 당연한 염려이다.
한편,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 4:11)라고 말한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이 나를 건지실 능력이 있으신가? 그분이 나를 잊지 않으셨는가?”라는 의심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염려에 빠지지 않고 자족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의 형편을 아시고 그에게 관심을 갖고 계시며 모든 것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일하신다는 것을(롬 8:28)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에게 닥치는 일이 선한 것인지 아니면 악한 것인지를 걱정하지 않고 모든 상황을 다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한편 신뢰와 체념은 서로 다르다. 전자는 믿고 맡기는 것이고, 후자는 완전히 수동적인 것이다.
체념한 사람은 굳이 하나님께 매달리는 수고를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미래에 대해 자포자기했기 때문이다.
체념한 사람은 무엇이든 적극적으로 할 필요가 없다고 여긴다.

이와 반대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적극적이다. 
주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분은 기도하고, 자신과 자신의 상황을 하나님께 맡기며,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였다.
이것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될 대로 되라”고 말하는 운명론과 완전히 다른 것이다. 

염려를 이기는 다섯 가지 지혜 
첫째하나님은 우리의 상황을 아신다.
시편 139편 8-10절은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라고 말한다.

둘째우리가 염려한다고 상황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
이따금 나는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폭풍우를 만나면, 비행기가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인가
하고 걱정한다.
그러나 내가 걱정한다고 해서 폭풍우가 멈추는 것도 아니고, 조종사에게 무슨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염려가 상황을 조금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염려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 
그것을 일소(一笑)에 부칠 수 있을 것이다.

셋째어떤 일의 결과가 우리의 예상만큼 나쁜 경우는 매우 드물다.
때때로 강의에 임할 때 나는 비판적 학자와 저명인사가 청중 속에 끼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럴 때 내심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결국 내가 부질없는 걱정을 했다는 자책으로 끝나고 만다.
왜냐하면 내가 걱정한 것만큼 나쁜 결과가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연히 호들갑을 떤다.
대개의 경우, 우리가 염려에 사로잡혀서 예상했던 것만큼 나쁜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넷째언제나 유쾌한 일만 일어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성숙한 신자로서 우리는 우리에게 닥치는 일이 고의적 죄의 결과가 아니라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내가 거기에 있지 않았더라면…’ 또는 ‘내가 용기를 내어 이러 이러하게 행동했더라면…’이라고 자책하지 말라.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섭리하시는 분이다.
이것이 구약의 욥기의 교훈이다. 우리는 욥처럼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므로 ‘내가 이러이러하게 행동했더라면 내 인생이 달라지지 않았을까?’라는 고민에 빠지지 말라.

다섯째걱정이 이루어주는 것은 없다.
성경에 나오는 신앙의 사람들을 깊이 묵상하라. 그들은 낙심하기 쉬운 불가항력적인 상황을 이긴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순종하여 떠났다.
그는 자기의 종착지가 어디일까 하고 걱정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에스더는 왕의 사전 허락 없이 왕에게 나아갔을 때 혹시 처형될지도 모른다고 걱정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감옥에서 요셉은 ‘하나님이 나를 잊어버리신 것이 아닌가? 내가 꾸었던 꿈이 정말로 실현될 것인가?’라고
걱정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전쟁 결과에 대해 바락과 논쟁하면서 드보라는 ‘이 사람을 설득하여 전쟁을 치르면 과연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걱정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만일 이 사람들이 걱정에 사로잡혀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면, 열매 맺는 지도자가 될 수 있었겠는가?

예수님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 19:26)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염려할 필요가 없다. 
우리 자신에 대한 염려가 간혹 정당화될 때도 있겠지만, 이것 역시 거의 생산적이지 못하다. 
우리 자신에 대해 염려할 시간에 차라리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행하고 결과를 
하나님의 손에 맡겨드리는 것이 훨씬 더 지혜로운 방법이다.